삼위일체의 내재 결과 엘리사벳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하느님 사랑의 첫 번째 결실은 완전히 자신을 잊음이었는데, 이는 곧 어떤 결별이 따르는 완전한 이탈로 나타나, 그는 인간적인 아닌 넘치는 기쁨에 취해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엘리사벳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랑의 왕국이 아주머니의 내면의 왕국 안에서 충만하게 건설되고 사랑의 무게가 아주머니 자신을 온전히 잊을 만큼 ... 아주머니를 사로잡으면 좋겠습니다. ... 이렇듯 완전한 이탈에 도달한 영혼은 복됩니다! 그 영혼은 진실로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엘리사벳을 성자의 모상으로 지으시기 위해 그 안에서 예술가의 손으로 일하시는 헌신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 자신으로서는 끊임없는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제 생각에, 아주 나약하고 심지어 많은 허물이 있는 영혼은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잊고 하느님의 품에 자신을 내던지고자 영혼이 하는 이 행위는 자신 안으로 굽어드는 것, 그리고 영혼이 자신의 나약함과 함께 살아가게 하는 모든 시험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립니다. 그 영혼의 중심에는 매순간 그를 정화시키려 하시는 구세주가 계십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어려운 것처럼 보일 거에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세요. 그게 단순하다는 걸 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제 ‘비결’을 알려드릴까 해요. 아주머니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그리고 아주머니는 바로 그분의 성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세요(1코린 3, 16). 성 바오로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린 그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편지 249).
엘리사벳은 영혼들에게 자신을 잊는 데 노력하라는 충고를 해줄 뿐 아니라 특별히 모든일들과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탈하여 오로지 그분의 것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권했다.
아기예수의 데레사라고 불린, 성성의 향기 속에서 24살에 임종하신 가르멜 수녀님 한 분을 특별히 아주머니께 맡겨 드려요. 그분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이 이승에서 선을 행하며 자신의 천국을 보낼거라 말씀하셨답니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영혼들을 넓히고 사랑과 신뢰, 그리고 의탁의 물결 위로 그들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잊어버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성인들이 이루시는 지식을우리를 위해 얻어주시고 영혼에게 많은 평화와 행복을 주실 수 있도록 저와 함께 매일 그분께 기도하지 않으실래요?(같은 곳).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같이 엘리사벳이 한 기도는 응답되었다. 엘리사벳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어리석다고 할 만큼 자신이 사랑한 삼위일체의 품 안에서 신뢰에 찬 의탁이라는 초성한 상태에까지 이르는 은총으로 들어높여졌다. 자아 정복의 은총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예정하신 변모적 합일로 엘리사벳에게 내려주신 은혜였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을 자아에서 이탈시키고 조용히 당신 자신에게로 이끄시면서 점차 삼위일체의 우정에로 인도하기 시작하셨다.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처럼) 아주 작은 자가 됩시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우리의 모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데려가실 수 있도록 우리를 맡겨드리기로 합시다. 그래요. 나의 작은 자매. 우린 참 나약합니다. 저는 우리가 비참한 존재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 점을잘 아세요. 그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당신의 순결하심과 거룩하심 안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길 참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과 끊임없이 접촉케 사시고 거룩하게 어루만지며 정화하십니다. 그렇게 그분은우리가 순결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순결함 자체이십ㄴ디ㅏ.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ㅣ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도록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건 정말 쉽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일치를 이뤄주는 사랑으로 매순간 사랑하는 겁니다(편지 172).
저 높은 곳에 살도록 부름을 받은 엘리사벳은 영원토록 하느님을 지복직관하는 기쁨 외에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것응 미리 맛보게 해주신 데에 크게 만족했다. “목마른 암사슴이 시냇물을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시편 41,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곳을 발견한 참새'처럼 '자기 새끼들을 둘 둥지를 발견한 제비'처럼(시편 83, 3) '영광의 찬미'는 복된 평화의 지견인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인도되길 기다리며 자신의 은신처, 자신의 행복,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게 될 미리 맛보는 자신의천상을 발견했습니다”(마지막 피정, 열여섯째 날). 그러나 자신의 인간적 본성은 기쁨과 고통, 수고와 희망의 감정들로 연속되었다. 삼위일체의 내재는 기쁨과 평화도 주지만 고통과 메마름도 번갈아 일으킨다.
기쁨과 동시에 고뇌를 체험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이 새로운 존재 양식의 특징인데, 이는 영혼이 바로 하느님의 소유로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이고, 고통은 하느님이 “사랑 놀이”에서 종종 영혼에게서 숨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권고한다. “활활 타오르든 용기를잃든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게 유배의 법칙이랍니다. 그러니 그분은 결코 변치 않으시다는 걸 믿으시면 좋겠어요. 그분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아주머니를 일으켜주시고 당신 안에서 확고하도록 당신을 아주머니를 향해 숙이십니다”(편지 249). 그 나머지 것, 곧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영광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엘리사벳은 이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고통과 사랑의 시험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러기에 사랑님과 친밀한 교류중에 머물 수 있었다. 엘리사벳은 “고통으로 점철된 영혼은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편지 315)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느님의 완전한 소유물이 된 엘리사벳은 무엇을 생각하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모든 것을 기도로 변화시키는 은사를 받았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삼위일체께 드리는 기도가 태어나게 된 것으로, 이 기도는 그의 내적인 삶과 영적 메시지의 종합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신비스러운 사랑의 포옹으로 무한하신 존재 안에서 모든 것들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미학적인 형태로가 아닌 내적 본질 안에 머물렀으니, 그것은 조만간 모든 피조물이 그의 행복을 함께 나누게 하는 자아의 선물이므로 이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 안에서 영혼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온전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참여하시는 방식으로 영혼 안에서 들이마시듯이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들이마실 수 있는 높은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삼위일체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일치 안에서 영혼은 참여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이 된다. ... 이것은 감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에 있어서 세 위격 안에서 변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영혼이 하느님을 닮게 된다는 것이고, 이렇게 해주시려고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셨다(창세, 1, 26; 십자가의 성 요한, 영혼의 노래 B. 39, 3-4).
제7장
영광의 찬미
이름의 뜻 엘리사벳에게 있어서 신적인 위격들과 일치하며 사는 삼위일체의 내재 체험은 곧 삼위일체에 대한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이 자기의 고유한 소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 엘리사벳의 이름과 성소는 영원으로부터 성부께서 예정해 놓으신 것으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의 소명은 삼위일체의 공동 생명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자기실현에까지 이르게끔 상승의 길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목표가 된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 11-12).
성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을 통해 그렇게 가르치며 말합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음에 품으신 이 원대한 꿈, 이렇듯 확고한 원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이 주신 소명에 응답하고 그럼으로써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온전히 찬미하는 영광의 찬미들이 될 수 있는가?(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아주머니는 제게 이렇게 물어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지? 그건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요한 4, 34). ... 흠승하올 스승님의 뜻에 일치하세요. 매번의 고통과 기쁨이 그분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고 여기십시오. 그러면 아주머니는 끊임없는 친교의 삶을 사실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머니께 하느님을 전해주는 성사(聖事)가 될 겁니다. 그분은 모든 것 안에 온전히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랍니다. 이젠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이 고통과 낙담의 상태에서 어떻게 그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지 아시겠죠?(편지 264).
엘리사벳은 계속 이어 이렇게 말한다. “영혼 자체를 강생하신 말씀과 일치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모든 것으로부터 적나라하게 벗겨지고 해방된 영혼은 그분과 더불어 자기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기도’(루카 6, 12)를 드리기 위해 이제 그 산을 향해 스승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언제나 성부의 영광을 높이 찬미하는 신적인 흠숭자를 통해 그 영혼은 ‘끊임없이 찬양의 제물,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는 입술의 열매를 바칩니다’(히브 13, 15).”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두고 찬미를 드리는 곳은 자기 영혼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되지만,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에 맞춰 연주하는 심포니에 꼭 필요한 음악의 음표 역할을 하는 것은 곧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엘리사벳은 짧은 이 지상의 삶을 마친 다음 하느님께 끊임없는 영광을 드리고자 당신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헤아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예배자이시며 찬미자이신 아드님과 자신을 일치시키려 전력투구한다. 엘리사벳의 사랑을 헤아려주시는 천상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은총의 상태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데 상응하는 영광의 상태를 그에게 베풀어주셨다.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과 일치하는 만큼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찬미는 하느님 안에 거하는 영혼이며 순수하고 사심 없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이 사랑의 감미로움 안에서 자신을 찾지 않는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넘어 그분을 사랑하며, 비록 그분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렇듯 그는 오직 사랑하는 분의 유익만을 원합니ㅏ. ... 영광의 찬미, 그것은 믿음, 단순함과 더불어 하느님께 고정된 영혼을 말합니다. 그는 하느님 존재 자체를 반영해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끝없는 심연과 같아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 당신 자신을 부어 주시며 점점 커 가십니다. 또한 그는 마치 수정과 같아 하느님께서는 이 수정을 통해 빛을 발하고 당신의 모든 완전함과 광채를 관상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영광의 찬미는 신적 존재께서 자기 영혼 안에 “당신 존재 전체와 당신이 지니신 모든 것”을 통교하도록 그분께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모든 선물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영혼입니다(믿음안에서 천국, 열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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