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숭 엘리사벳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사랑을 통해 또 사랑 안에서 관상하던 거룩하고 분리불가한 삼위일체는 자신의 관대한 사랑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흠숭의 대상이 되셨다. 하늘나라의 복된 이들의 활동이 흠숭 예배인 까닭에 엘리사벳 또한 영원토록 바쳐드리는 사랑의 흠숭 행위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또 앞으로 오실 분..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묵시4, 8, 10-11). 어떻게 하면 영광의 하늘 안에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몰두하는 진복자들의 모습을 내 영혼의 하늘 안에서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러한 찬미, 이처럼 끊임없는 예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사랑에 뿌리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는 것. 제가 보기에 이것은 영광의 찬미라는 직무를 훌륭히 완수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 무엇보다도 영혼은 자기 허무의 심연 안에서 ‘엎드리고’ 잠기며 그곳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 이제 비로소 그는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습니다(마지막 피정, 여덟째 날).
엘리사벳이 하느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는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전적인 포기와 자아의 선물로 표현된 사랑의 응답을 드러내 보였다.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서 영원히 당신 자신을 통교해 주시는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인식되신다.
영혼은 단순한 시선으로 자신의 신적 대상을 관상함으로써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며, 특히 자신에게서 이탈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사도께서 이미 말씀하신 “하느님께 대한 분명한 앎”(2코린 4,6)과 더불어 밝히 빛납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신적 존재께서 “자신에게 전해 준 모든 속성들”(사랑의 산 불꽃, 3, 77) 이 반영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자신의 주도권을 내어드리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 영혼은 그분이 선사하신 모든 선물과 더불어 그분을 노래하는 영광의 찬미가 됩니다. 그는 만사를 통해 그리고 심지어 가장 평범한 행동을 통해서도 “이 위대한 노래, 새로운 노래”(묵시 14, 3 참조)를 부릅니다. ... 그리고 이 노래는 하느님을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시킵니다(마지막 피정, 셋째 날).
“천상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스승님께서 저로 하여금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이 말씀을 알아듣게 해주시기에, 제가 보기에 그분께서는 성부처럼 “그 이전이나 그 이후도 없이”(뤼스브룩) 오직 제 존재가 총체적으로 모두 이 “영원한 지금” 안에서와 같이 그렇게 “영원한 현재 안에” 살기를 청하십니다. 이 현재는 무엇일까요? 보십시오. 다윗은 제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늘 그분 자신 때문에 그분을 흠숭합니다”(시편 71, 15). 보십시오. 영광의 찬미는 이 영원한 현재 속에 거처를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러한 흠숭의 태도 속에서 참되기 위해, 그리고 “나는 새벽을 깨우리라”(시편 556, 9 참조) 하는 노래를부르기 위해 우리는 성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그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필리 3, 8)... 이제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자신의 하느님을 흠숭하게 될 것이며” 그분의 모상에 따라 그분이 거하시는 이 영원한 현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지막 피정, 열째 날).
자아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깨달으며, 영원한 말씀의 모범에 일치된 엘리사벳은 지나가는 이 순간뿐만 아니라 이 지상의 실재를 품어 안고 영원한 현재 중에 초월적인 하느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적 생명의 근본적인 비결을 찾아냈다. 일관된 믿음으로 환상이 아닌 믿음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는 엘리사벳에게 경배란 그리스도와 일치된 자신의 전 존재의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엘리사벳이 아버지께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의 거룩한 인성을 통해서였다.
그분을 ‘영’으로 흠숭한다는 것은 곧 그분께 고정된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이며 믿음의 빛을 통해 그분을 충만하게 아는 영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분을 ‘진리’ 안에서 흠숭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 즉 진실한 우리의 행동을 통해 그분을 흠숭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립시다”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과 진리 안에서 진실로 예배를 드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아홉째 날).
엘리사벳의 가르멜 성소에서 자신의 기도 생활과 끊임없는 예배로써 각인된 하느님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삼위일체의 영광의 찬미가 된다는 깨달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인류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전례 행위로 거행되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모든 만물을 당신의 보다 큰 영광을 향해 질서 지우신다면, 실제로 하느님의 유익을 바라고 원한다 함은 그분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영혼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만큼 그렇게 온전히 열정적으로 그분의 뜻을 완성하는 데 깊이 몰두해야 합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찬미 엘리사벳은 그분의 무한한 영광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영광의 찬미는 언제나 은총의 활동 속에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움직임 그리고 모든 생각과 열망은 그를 사랑 안에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은 영원한 지성소를 드러내는 메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같은 곳).
영광의 찬미는 자기 영혼의 천상에서 이미 자신의 영원한 사명을 시작합니다. 그의 찬미가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 온전히 활동하고 계신 성령의 작용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이 점에 대해 인식하진 않더라도-본성의 나약함으로 인해 아무 산란함 없이 늘 그분께 고정되어 있지는 못하더라도-그는 언제나 찬미가를 부르며 주님을 경배합니다. ... 우리는 우리 영혼의 천상에서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미하는 이들, 원죄 없으신 우리 어머니의 사랑을 찬미하는 이들이 되기로 해요. 베일이 걷히게 될 어느 날엔가 우린 영원의 뜨락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곳에서 우린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노래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하는 이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이름”(묵시 2, 17 참조)을 주실 겁니다. 그 이름은 무엇일까요...? 영광의 찬미(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엘리사벳에게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는 말은 특별히 삼위일체께서 모든 피조물과 통교하시기 때문에 내외적인 무한한 영광으로 당신께 영광을 돌려드린다(찬미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의 찬미를 인식하기 위해, 엘리사벳은 자아를 떠나, 자아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죽고 부활함으로써 영광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옷입고 자신을 삼위일체의 영광에 대한 능동적 관상에로 통합시키는 사랑의 이끄심대로 맡겨 드린다. 이것은 육화하신 말씀의 중개로 이루어지는데, 그분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찬미가 되시기 때문이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설한” 영혼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분은 영혼이 자기 자신, 감각들, 본성, 위로와 고통들 위로 그리고 오직 그분이 아닌 모든 것 위로 들어 올려진 그곳에 계신 바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제가 “감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길” 바라십니다. 모든 것을 감사 속에서 끝맺어야 합니다! “아버지, 당신께 감사드립니다”(요한 11, 41). 이것은 바로 스승님께서 노래하신 것이며, 그분은 이 반향이 제 영혼 안에서도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분께서 더 즐겨 하시는 것이자 하느님을 매료시키는 ‘새로운 노래’는 자신을 벗어버림으로써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부르는 노래입니다(마지막 피정, 열셋째 날).
영혼 안에 반사되신 하느님은 고통의 길을 통해 인류와 당신 생명을 통교하시는 행위로 당신 존재를 인식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고통을 당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모습에서 그분 최고의 사랑 행위를 바라보신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합당한 영광의 찬미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열망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보십시오. “구원의 잔을듭시다”(시편 115, 3-4). 제가 만일 스승님의 피로 붉게 물든 그 잔을 들고 감사드리며 진정 기뻐하고 제 피를 거룩한 희생제물이신 그분의 피와 섞는다면, 그 잔은 거의 무한한 가치를 갖게 되며 성부께 최고의 찬미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고통은 영원하신 분의 “영광을 전하는 소식”이 됩니다(마지막 피정, 일곱째 날).
오로지 파스카의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써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찬미를 노래할 수있고 그분의 영광을 후대에게 전해 줄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에 참된 영광이 된다. 게다가 엘리사벳 자신이 전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 봉헌하지 않았다면 완전한 찬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디종의 신비가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렸고 내적으로 그분께 경배를 드렸으며, 피 흘림은 없지만 그만큼의 고통과 정화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랑을 그분께 봉헌함으로써 찬미를 드렸다. 장막 건너편과 또 믿음 저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기를 고대하면서 엘리사벳은 전적으로 자신을 그분께 사랑으로 바쳐드렸다.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건 어둠 속에서 천국과 같아. 그러나 언젠가 베일이 걷히면 우린 사랑하는 그분을 빛 속에서 관상하게 될 거야. 우리는 신랑의 ‘오심’을 고대하며, 그분을 위해 수고하고 고통 받아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을 많이 사랑해야 해”(편지 162). 이것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일치된 영광의 찬미가 된 엘리사벳의 삶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