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상 수녀
엘리사벳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해 나가면서, 말씀에 충실하고 성령의 활동에 유순히 따르신 동정 마리아로부터 생생한 모범을 발견하였다. 엘리사벳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는 여정에서 특별히 좋은 벗으로 동정 마리아를 만났다. 엘리사벳은 완전히 유순하게 들음으로써 공동 구속자로부터 부름 받은 하느님의 어머니시고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자기 자신을 맡겨 드렸다. 동정 마리아는 성화 은총으로 말씀에 충실히 귀기울이고 특별히 강생의 신비에 긴밀히 참여하심으로써 삼위일체와의 신비적 일치에 매우 신속하게 도달하셨다. 상호 간 사랑의 관계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를 이룬 동정 마리아는 온 생애를 관상에 전념하였다.
동정 마리아는 신비체 안에서 관상과 활동, 어느 한 가지를 선호하지 않고 진정한 기도 안에서 그 두 가지를 융합하는 사도적 활동의 모범을 엘리사벳에게 선사해 주셨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택의 행동들이 엘리사벳의 마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동일한 사랑의 표현이 됨으로써 이러한 것 중 어느 하나를 택해서 한 활동 역시 그의 마음 안에서는 갈림이 없는 똑같은 사랑의 표현들이 되었다.
제가 보기에, 동정녀께서 수태고지부터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기 전까지 보낸 시간 동안 지니셨던 태도는 자신의 내면에서, 끝없는 자기 심연의 바닥에서 살도록 하느님이 선택하신 사람들, 즉 내적인 영혼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마리아는 그런 평화와 거둠 속에서 얼마나 모든 것에 순종하고 봉사하셨는지 모릅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그분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동정녀께서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선물을 흠숭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애덕을 실천해야 할 때 그 외의 모든 것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진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의 집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유다의 산을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분께서 관상하셨던 형언할수 없는 비전이 그 자체로 그분의 외적인 애덕을 감소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신심 깊은 저자가 말하듯이, 만일 관상이 “주님의 찬미와 원함까지 나아간다면 그는 통일성을 갖게 되며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명령이 내린다면 그분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 그들의 필요를 깊이 느끼고 그들의 모든 비참함을 향해 마음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분게서 울고 비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불처럼 밝히 빛나십니다. 그분은 불처럼 태우고 빨아들이시며 불살라버리십니다. 그리고 불사르신 것을 천상으로 들어올려 주십니다. 지상에서 당신의 사명이 끝난 다음, 그분은 다시 높이 날아올라 불꽃 가운데 타오르면서 저 높은 길을 새로이 걷기 시작하십니다(믿음 안에서의 천국, 열째날).
엘리사벳은 온통 감정적인 신심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열정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사랑은 성모님 안에서 가르멜 수녀로서의 성소와 이상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데 끊임없는 자극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엘라사벳은 생애의 마지막 저녁에 성모님께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고자 했다. “제게 가르멜 수도복을 주신 분은 바로 원죄 없으신 동정 성모님이십니다.”
침묵과 잠심의 동정녀 말씀의 풍성한 수확은 동정성과 말씀에 신뢰하는 영혼의 의탁에 달려있으므로, 이것은 침묵과 잠심의 분위기를 요청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고 하시는 성모님의 모범을 떠올릴 수 있다 .엘리사벳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정녀는 이 모든 것을 당신 마음 속에 간직하셨다.” 그분의 모든 역사는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마음 속에 사셨으며 그 마음이 너무도 깊은 나머지 어떤 인간의 눈길로도 그분께 다다를 수 없습니다(마지막 피정, 열다섯째 날).
육화하신 말씀의 침묵에 깊이 몰입된 엘리사벳은 넌지시 성모님께 자기에게 당신의 감정을 건네주시기를 청함으로써 영원한 말씀의 메아리가 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이 쓰는 용어로 순결과 동정,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원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영혼의 이상적인 특징이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성모님의 기도는 언제나 이러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마지막인 “주님의 여종!”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진정 겸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잊힌 분이며 알려지지도 않았고 당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우시기 때문입니다(마지막 피정, 열다섯째 날).
엘리사벳은 자기 영혼 안에 무한하신 말씀을 모시는 소명을 받았기에, 하느님 사랑에 더욱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비결을 하늘로부터 배워 영성생활에 너무나 뚜렷한 가르멜 수도자로서의 모성의 감각을 성취하였다. 마리아와의 신학상 밀접한 일치에 앞서 그리스도와의 합일이기도 한 삼위일체의 영광의 찬미는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신비 참여에서 나오는 소명, 곧 어머니의 새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엘리사벳은 삼위일체와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 이상과 공동 구속자로서의 소명에 참여하는 것을 동정 마리아 안에서 깨달았다. 이런 이유로 한번은 슬픔에 빠져있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다.
통고의 성모님의 꿰뚫린 성심을 지나는 가운데 할머니께 편지를 씁니다. ... 그래서 고통 속에 잠긴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 곁에 살며 예언자가 부른 이 무한한 고통 중에 그분과 더불어 삽니다. 이 집은 예정된 이들의 집이자 “성부께서 아시고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당신 성자를 닮길 바라는” 이들의 집입니다(앙테스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6. 9. 18).
이 겸손한 가르멜 수녀는 마리아를 통해 마리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은총의 중재자가 된다, 그것은 바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가 말하는 한 알의 겨자씨가 된다. 그 씨앗은 마리아라는 깨끗한 밭에 뿌려져 온 세상에 구원의 열매를 공급해 주는 십자가의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 아래 서 있는 마리아는, 사제가 늘 도움을 청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사제적인 동정녀”(슈비냐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5. 6. 25)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된 완전한 본보기이며 살아있는 모범이시다.
마리아는 사랑이 깃든 믿음의 생생한 화신이며, 엘리사벳에게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 온 세상에 복된 구원의 은총을 전파하기 위해 신적인 샘을 영원히 관상하는 영혼과 엘리사벳 자신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를 청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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