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사이에
엘리사벳의 생각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완전하게 이루기까지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자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무상의 초대에 전적인 믿음의 응답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엘리사벳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는 다다르지 못할 어떤 대상이 아니다. 엘리사벳이 종종 사용하던 “하느님 안에 머문다”는 표현은 사실상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삼위일체와의 신비적인 일치에 방향을 두고 믿음, 희망, 사랑 안에서 계속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거닌다고 말할 때는 그것이 유한한 인간 영역에서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영원한 영역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유쾌한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만물은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손길로 스며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네 안에서 당신의 예정 사업을 완성하실 수 있게 해드리렴. 그러기 위해 다시 한 번 성 바오로께서 네게 선사해 주시고자 하는 삶의 계획을 들어 보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내리고 그분 위에 건설하며 믿음 안에서 굳건해지십시오. 그리고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 안에서 더욱더 성장하십시오”(콜로 2, 6-7). ... 그분 안에 뿌리내리렴. 그러기 위해 너를 너 자신으로부터 뽑아내렴.(편지, 1906. 9. 9. 경)
엘리사벳은 다른 편지에도 같은 내용을 써 보낸다. “우리는 허무이자 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 그분은 홀로 거룩한 분이며 우리를 구원하고 정화시키시며 당신 안에서 우리를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도전을 기억하세요?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낼 수 있습니까’(로마 8, 35)?’” 엘리사벳이 지상에서 천국을 계속 살아가게 된 것은 특히 그리스도를 뒤다름에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의 성령께 맡겨드리고 그 이르심에 따라 행동한 데 있다.
아버지의 초대에 신속하고 완전한 엘리사벳의 무조건적인 응답, 사랑하는 임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는 가르멜에서 놀랍고도 모험적인 상황들로써 하느님 뜻에 온유하고 순종적이며 성실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문턱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만일 엘리사벳이 가르멜에서의 삶을 “예기된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수도서원으로 세속과 자신에 대해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서약에 충실하고 자아와 이 세상의 사정들을 초월하면서, 자신의 철저한 선택을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 매일 자아에 죽어야만 했다. 엘리사벳은 “만일 행복의 비밀에 대해 내게 물으면, 난 이렇게 말할거야. 늘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사벳은 이 세상살이에서도 하느님의 영역에 인도됨으로써 모든 것을 바로 그 본질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은 주치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제 유배의 마지막 시간, 제 생애의 아름다운 오후에 모든 것이 영원의 빛 아래서 얼마나 중요하게 드러나는지 모릅니다. ... 하느님을 위한 게 아니라면 지나가는 모든 것은 그저 헛되고 허무할 뿐이라는 사실을 모든 영혼들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 빛과 그늘 아래서 하느님 신비에 대한 부분적인 깨달음은 그 초월성으로 엘리사벳을 압도시키거나 두려움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영혼 안에 흐르는 신적 생명에 도움이 되는 든든한 일치감을 마련해 주었다.
제가 이 성소의 품격에 맞게 살 수 있도록 그분께 은총을 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제가 푸짐하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남용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게 종종 제게 두려움을 일으킨다는 것을 신부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저는 성 요한께서 ‘충실하고 진실한 분’이라 부르신 그분께로 달려들어 그분 친히 저의 충실함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편지, 1905년 12월).
디종의 가르멜 수녀는 신적 친밀에로 향한 자신의 성소를 깨닫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미래’의 삶을 살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생애는 축복된 대사건을 기다리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받은 자신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완전하게 인식하는 데 분발하는 것이었다. “저는 ‘동정녀’이자 ‘어머니’라는 두 가지 소명 안에서 가르멜 수녀로서의 제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동정녀’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혼인한 여인을말하며, ‘어머니’란 영혼들을 구하는 가운데 에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입양된 성부의 자녀들을 많이 낳는 여인을 말합니다”(편지, 1904. 4. 27). 엘리사벳은 내세에서 보게 될 그 넓은 빛의 바다에서 신부와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들을 품어 안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다. 불타는 이 수녀는 생애 마지막에 내적을ㄹ 사는 사랑의 신비가 세상의 가장 먼 끝에 다다르고,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도 이를 수 있으므로 세상을 변화시켜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세계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저는 지금 신성하신 세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변모에 대해 가르치는 우리의 복된 사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아름다운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깊은 영광의 심연으로 부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더 이상 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인들의 침묵과 거둠을 이해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신비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신부인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 완성되는 신성한 정상으로 그분들을 데려가십니다. 복되신 우리 사부께서는 이로서 성령께서 지극히 경이로운 높은 경지로 영혼을 들어 올리신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성부께서 성자와 더불어, 그리고 성자께서 성부와 더불어 만드시는 같은 사랑의 갈망을 하느님 안에서 만들어 내도록 영혼에게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갈망이란 다음 아닌 성령을 말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성소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 거룩한 빛 아래 살도록 불러주셨음을 말하는 게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흠숭할 만한 사랑의 신비인지요! 저는 제 영혼 깊은 곳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사라지고 그분 안에서 변모되기 위해, 동정 성모님처럼 “모든 것을 제 마음에 간직하고,” 말하자면 제 영혼의 밑바닥에 깊이 잠기는 가운데 이 지상을 지나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 모토 “빛나는 제 이상”은 실현될 겁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진정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이 될 겁니다!(편지, 1903. 11. 28)
엘리사벳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같이 시선을 자기 내면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아주 깊은 신적 생명을 감지하며 마음 속 지성소에 깊숙이 살고파 더 깊이 자신 안으로 들어가기를 힘껏 노력했다. 엘리사벳은 이렇듯이 “삼위일체와의 내밀한 관계”에 계속 충실했으므로, 선종하기 바로 직전에 “ (이는) 제 삶을 미리 누리는 천국으로 만들어 주며, 제 삶을 비춰준 아름다은 태양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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