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를 통해서 삼위일체께
엘리사벳은 1894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한 편의 시를 성모님께 지어 드리며 기도했다. “사랑하올 어머니, 당신의 가르멜 안에 숨어 계시는 아드님과 함께 저도 가르멜에서 영원히 숨은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이틀 후에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게도 헌시하였다. “예수님께 극진한 사랑을 받으시는 사랑하올 가르멜 수녀님, 주님께서 저의 기도도 들어주시게 해주셔요.” 엘리사벳이 끊임없이 청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서 숨어 사는 것으로, 그것은 봉쇄의 좁은 세계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닌 동정 마리아의 인도 아래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 안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글에는 뽑힌 영혼들을 향한 엘리사벳의 기도 초대가 나온다. “동정 성모님을 깊이 관통하신 분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도록,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안 끊임없는 친교요 단순한 움직임이 될 수 있도록, 지극히 순수하고 빛나는 동정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로 해요”(슈비냐르 학사에게 보낸 편지, 1903. 6. 14). 자기 영혼에 삼위일체의 내재하심을 영성 생활의 기반으로 삼았던 엘리사벳은 그러한 신비를 완전하게 실아가는 비결을 마리아 안에서 찾아내고 있다. 마리아의 확고한 응답, Fiat에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친밀하고도 고요한 영원한 합일 중에 생활하셨다는 사실을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깨닫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엘리사벲에게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령의 활동에 따라 마리아 안에서 마리아와 함께 말씀의 신비를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고요한 예배의 분위기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하는 가운데 엘리사벳은 천상의 어머니께 신적 친밀성의 비결을 꾸준히 청했다.
영혼을 영원하신 말씀과의 친밀에로 인도하는 것 외에도 뽑힌 영혼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생생한 목소리로 울리도록 그분의 모상과 유사하게 양성하는 것은 동정 마리아의 소명이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이 천상 모후께 드리는 기도는 피조물 안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일상 생활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해 가기 위해 마리아처럼 교회에 또 다른 그리스도를 많이 출산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엘리사벳이 인류 구원을 위한 고통의 몫에 동정 마리아와 함께 연합해야 됨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은 굳건하고도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시다.” 스승님은 그분을 제게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 그리고 이제 스승님은 성부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제 육신 안에서 고통받을 수 있도록” 저를 십자가 위의 당신 자리에 놓아주셨습니다. 동정녀께서는 그분처럼 고통 받는 법을 제게 가르쳐 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당신 이외에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마지막 노래들을 제게 전하고 들려주기 위해 여전히 그 곳에 계삽니다. 제가 “다 이루었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게 될 날, ‘천상의 문’이신 어머니께서는 아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님의 집으로 가자고 사람들이 내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라는 신비로운 말씀을 제게 하시며 저를 천상 뜨락으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마지막 피정, 열다섯째 날).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뿐 아니라 당신에게 신심을 둔 모든 영혼들에게 하늘의 문이 되어 주시므로, 그들은 마리아를 통해 영원하시고 복되신 삼위일체의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엘리사벳은 어떤 이에게서 받은 강생의 모후 성화를 묵상함으로써 복되신 삼위일체와 마리아의 친밀한 관계를 충분히 납득하게 되었다.
‘작은 천국’이라 부르는 우리 작은 수방의 고독 안에서 이 소중한 그림을 자주 보며, 저는 말씀께서 동정 성모님 안에 강생하시고 성령께서 위대한 신비를이루기 위해 그분께 내려오실 때 성부께서 당신의 그느르심으로 덮어 주시던 동정 성모님의 영혼과 일치하겠습니다. 삼위일체 모두가 활동하시고 당신을 선물로 내어주십니다. 가르멜 수녀의 삶은 바로 이 신성한 만남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수르동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5. 11. 25)
엘리사벳은 내적으로 깊이 잠심하면서 동정 마리아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고, 자신의 이름과도 같이 이제는 영원한 지복직관의 황홀경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그침이 없는 영광과 찬미가 되고 있다.
행동하는 관상가 실제로 엘리사벳은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고 있으므로, 그 사랑의 생활은 가르멜의 네모진 벽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기쁨과 걱정들을 품어 안아야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신적 독수리의 날개에 실려 하느님의 초성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의 가면을 넘어서야 함을 깨달았다. 이는 자기희생과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그분을 향한 간청, 특히 영혼 전체가 하느님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하느님 또한 당신 안에서 영혼을 변모시키기 위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내밀한 대화인 기도 안에서 힘을 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제르멘 드 제모에게 보낸 편지, 1906. 6. 10 경).
마리아를 동반자로 모신 엘리사벳은 관상의 길로 인도되었다. 엘리사벳에게 관상이란 육화하신 말씀, 곧 그리스도 안에 영혼이 확고하게 정착됨으로 “실체의 중심에까지 관통하는 사랑의 직관”을 의미했다. 엘리사벳이 이르듯이 “성 바오로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매순간 우리가 더욱더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도록’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모델이신 분을 더욱 분명히 닮고 그분과 더욱 긴밀하게 일치하도록 해줍니다”(보베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6. 10월 말). 그렇지만 그 상태에 달하기 위해서 엘리사벳은 자아에서 이탈하고 자신을 부정하며 자기 자애심까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걷는 것, 그것은 제가 보기에 매순간을 그분 안에 뿌리내릴 만큼 아주 깊이 들어가고자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자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과 사물을 통해 이 아름다운 도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누가 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영혼이 그토록 깊이 그분께 고정될 때, 그렇게 깊이 뿌리내릴 때, 신적인 수액이 그 안에로 풍요롭게 침투해 들어가며 모든 불완전하고 진부하며 본성적인 삶을 깨뜨려버립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사멸할 것이 생명에 삼켜집니다.” 이처럼 자신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입은’ 영혼은 더 이상 외부의 접촉이나 자신 안에 있는 어려움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에게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스승님의 사랑 안에 보다 깊이 뿌리내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마지막 피정, 열셋째 날).
그리스도의 은혜로 준비되고 확증받는 이 새로운 상태에서 엘리사벳은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 생긴 구분을 넘어섰다. 즉 사도직에서 관상과 활동은 두 가지의 기회로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구세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의 유일한 사랑의 행위로 엘리사벳의 삶 안에 평화로이 공존하게 된다.
관상 수녀 엘리사벳의 생애에서 관상과 활동이라는 이 두 가지는 애덕의 끈으로 연결된 것으로 하나이기에 이것들을 인위적으로 가르지 않고 두 가지를 완전하게 조화시켰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침투되고 은총으로 스며들며 성령의 활동으로 고무된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문제들과 수고로움, 기쁨과 고뇌에서 그들과 일치감을 가짐으로써, 기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도이자 가르멜 수녀인 엘리사벳은 이 세상에 사도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동정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과 확고하게 합일된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르멜에서 사랑하는 깊은 고독에서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온전히 그분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저는 전능한 자가 될 겁니다. 눈길 하나, 하나의 원의마저도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기도가 될 겁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에게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오직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길, 그리고 신부님께서 그분을 영혼들에게 전해주시길 빕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이 영혼들 사이에서 풍성해지도록 청하며, 침묵과 흠숭 가운데 머물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분의 발치에 머물겠습니다. “사도와 가르멜 수녀,” 그건 결국 같은 말입니다(보비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04. 6. 22).
엘리사벳의 관상생활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사랑의 양면을 통합하여 결실 푸진 조화를 이루었다. 따라서 엘리사벳이 하는 기도는 전적으로 탈속적이라든가 세상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동정 마리아가 하던 기도와 같이 그리스도께 접목되었다. 또한 마리아는 자기 자신에게 신적 시선을 이끄는 겸손과 단순성에 기반을 둔 활동과 관상, 이 둘을 완전히 하나로 통합시켰다.
마리아는 그런 평화와 거둠 속에서 얼마나 모든 것에 순종하고 봉사하셨는지 모릅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그분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동정녀께서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선물을 흠숭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애덕을 실천해야 할 때 그 외의 모든 것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진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사촌인 엘리사벳의 집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유다의 산을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분께서 관상하였던 형언할 수 없는 비전이 그 자체로 그분의 외적인 애덕을 감소기키지는 않았습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가르멜의 전통적 유산과 동정 마리아와 가르멜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엘리사벳ㅇ든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와 이웃에 대한 사심없는 봉사가 하나가 된 애덕의 사도적 측면을 강조했다.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말을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한 것처럼 엘리사벳은 완전히 그분의 숭엄한 빛과 사랑에 잠겼다. 하느님의 숨겨진 신비 속에 동참한 그의 생애는 “영혼 안에 주님의 강생을 준비하는 대림”(슈비냐르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05. 12월)”과 같았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평범한 의무 역시 그리스도와 동정 마리아가 지닌 구원 소명의 연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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