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봐요.
그분께서 저를위해 어떻게 당신을 내어놓으셨는지 보면, 그분께서 제게 주신 것 중에 다소 얼마간이라도 돌려드리려는 마음에 저도 그분을 위해 전력을 다하며 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서간 156).
엘리사벳의 수덕 생활
본질적으로 엘리사벳의 수덕 방법은 마음의 겸손과 단순성 안에 살기 위한 끊임없는 자아망각에 있었다.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신을 잊고 자신을 이탈하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스승님, 오직 스승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는 영혼을 지극한 평온함에 놓아둡니다”(보베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6. 10월 말). 엘리사벳의 수덕생활 중 또 다른 요소는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 위해 매일 자아포기의 희생 행위인 극기를 실천한 일이다. “희생과 포기의 길에서 수련하시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건 모든 신자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 이건 아주 큰 고행이 전제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계속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선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제르멘 드 제모에게 보낸 편지, 1906. 6. 10 경). 그 외에도 거기에는 엘리사벳이 자신을 극기하고 점차로 자아에서 완전힌 이탈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에게 부과하는 육체의 고통도 있다. 엘리사벳이 행한 수덕 실천은 한마디로 전적인 자기 무아(無我)가 따르는 자기비허(kenosis)로 향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이 길을 단숨에 걷는 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승님께서 “만일 누군가 내 뒤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려아 한다(마태 16, 24 참조)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바로 자신을 벗어버리는 것, 자기 자신에게 죽는 것,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마지막 피정, 아홉째 날).
엘리사벳은 자기를 잊고 극기를 실천하며 자발적으로 기쁘고 침착하게 고통을 수락하고, 성격을 교정하기 위해 투쟁하며 침묵 중에 희생하고 가르멜에 들어가기 전후로 세속과 자아에서 이탈하기를 원하고 실천하였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했다. “성인들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와 고통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을 오랫동안 관상하고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슈비냐르 학사에게 보낸 편지, 1904. 11. 29) 이미 말한 엘리사벳의 수덕 생활에 뒤이어 성령께서 직접 시작하고 성취하시는 정화의 작업, 곧 믿음의 어두운 밤이 다가왔다. 이 밤에 영혼은 한가하게 머물지 않고 열렬한 신앙의 자세로 하느님이 뜻하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며 내적 변용의 작업에 협조하게 된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기도와 덕행 수행에서 전에 맛보던 대단한 애정과 감각적인 만족을 빼앗기고 완전히 메마름에로 내던져졌을 때, 엘리사벳은 처음으로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깨닫고 믿음, 희망, 사랑을 증거하기에 이른다. 이제 엘리사벳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삶에 부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성 생활에서 진일보한 비결이었다. “내 생각에, 이상적인 영혼의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초본성 가운데 살아야 한단다. 다시 말해서 결코 본성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계셔.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잊지마”(프랑수아즈 드 수르동에게 보낸 편지, 1906. 9. 9 경).
엘리사벳이 기도 중에 하느님의 세 위격과 자신의 친밀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 당신을 감추고 계시는 하느님 현존 안에서 가지던 단 하나의 믿음에 의한 것이다.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엄한 시험에도 상관하지 않고 늘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다. “성 요한과 함께 ‘사랑 안에서 믿는’ 동안 우린 그분을 소유하게 될 테니, 우리의 천국을 어둡게 할 수 있는 밤이 뭐가 그리 대수겠니? 만일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 같으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쉬자꾸나.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게 있기로 해. 그분을 깨우지 말고 신앙 안에서 기다리기로 하자”(동생에게 보낸 편지, 1905. 8. 13). 깨어 기다리는 시간에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 버리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이고, 또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분을 희망하는 가운데 영혼을 감싼 어둠을 환히 밝히는 믿음 안에서 강해지는 일이다,
이 믿음을 보십시오. 제게 드러나는 이 아름다운 믿음의 빛을. 그것은 제가 신랑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비춰줄 유일한 빛입니다. ... 제 모든 능력을 밤이 되게 하고 비우는 가운데 “거룩한 어둠” 속에 잠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스승님을 뵙게 될 것이며, 저 역시 “그분을 두른 빛을 겉옷처럼”(시편 103, 2) 두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부가 “하느님의 광채”를 간직히는 가운데 당신의 빛, 당신의 유일한 빛으로 밝히 빛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마지막 피정, 넷재 날).
엘리사벳은 이러한 자세로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엘리사벳은 인내의 한계로 고통스러워하고 영성체를 허락받지 못할 때도 십자가의 사랑임을 찾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닌 생명의 샘”이고 고통과 정화를 거쳐야만 자신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실제로 영원히 관상하는 가운데, 의인이 누리는 평화를 자신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죽음과 부활 무엇보다도 시련이 닥쳤을 때 사랑으로 사는 것은 엘리사벳의 프로그램이자 변치 않는 약속이었다. 그러한 일을 실현하기 위해 엘리사벳은 자기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용시키려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육적이고 정신적인 어려운 시련들을 받아들이며 견디어냈다. 그렇지만 그러한 내적 쇄신은 영적 정화를 치른 후에만 가능할 수 있었다.
포기를 통해 이 신성한 목적에 이릅니다. 우리의 모든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 드리기 위해 그분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죽기로 해... 우리 주님이 니코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요한복음의 아름다운 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 3).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내면에서부터 우리를 쇄신하기로 해요. “우리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을 따라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 9-10). 이는 그를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 가운데 감미롭고 단순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영혼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바랄 것도 없습니다. 그의 뜻은 온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사라져 버리며, 합일이 그렇게 만들어 주듯이, 영혼은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라 2, 20).
사랑의 희생제물인 엘리사벳은 매일 자아에 죽으려고 상당한 노력을 했다. 엘리사벳은 성 바오로와 함께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죽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후, 모든 신자들의 규범이 됐단다. 그러나 아주 엄격한 것처럼 보이는 이 가르침은 이 죽음의 마지막이 어떤지 보면 감미롭기 그지없는 애정 가득한 말씀임을 알게 될 거란다. 그 마지막이란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 대신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누린다는 거야(프랑수아즈 드 수르동에게 보낸 편지, 1906. 9. 9. 경).
이렇게 매순간 자아의 죽음을 실현함으로써 엘리사벳은 오로지 자신의 세례서약을 상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성 바오로가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말씀,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 3)를 인용하면서 엘리사벳은 덧붙인다. “이게 바로 조건입니다. 죽어야 합니다!”(마지막 피정, 여섯째 날). 엘리사벳은 이 무혈의 순교를 받아들이고 실제로도 그것을 열렬히 원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완전히 일치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스승님께서 나도 당신을 위해 피를 흘리길 바라신다면 나도 많이 행복할거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분께 청하는 것은 교회가 “애덕의 희생제물”이라 선포하신 우리 사모 성녀 데레사를 불사른 사랑의 순교야. 이미 진리이신 주님은 가장 큰 사랑의 시험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라 말씀하셨으니, 나도 내 생명을 그분께 드려. 이미 내 생명은 당신 마음에 드시는 대로 처분하시도록 그분의 것으로 맡긴 지 오래야. 내가 만일 피의 순교자가 아니라면 사랑의 순교자가 되고 싶어(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906. 6. 19).
믿음이 강해진 엘리사벳은 모든 영적인 시련들을 인내로이 견디어 냈다. 엘리사벳은 분명 육신의 유혹들을 극복했고, 고행과 자아에 대한 극기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실상 엘리사벳의 삶이 성성에 이르기 위해서뿐 아니라 파스카의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화되기 위한 자아 부정의 생활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 젊은 가르멜 수녀의 수도생활 전부는 참된 사랑의 순교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수도서원 전날 밤 기도에서 고통과 극기의 삶이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위대한 날 바로 전날 밤에 신랑을 기다리며 가대소에 있을 때 저는 천국이 이승에서 시작됐으며 그 천국은 믿음 가운데 있고 제가 사랑하는 그분 때문에 고통받고 희생되는 것이 수반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앙글레 참사회원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03. 7. 15).
엘리사벳은 고통을 겪으시는 그리스도를 닮아 점차로 믿음, 희망, 사랑을 통해 영광에 드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분과 함께 가장 깊숙이 숨겨진 신적 지식의 휴식처로 인도된다. 이는 엘리사벳의 성부 하느님, 성자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의 하느님, 그리고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충만하고 직접적인 지식을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동안 고통 중에 살며 체험하던 사랑이 신적 사랑 안에서 모두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었다. 세례 때 엘리사벳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한 파스카 부활 신비 쇄신은 전적으로 신비적인 죽음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어제 성 바오로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신비적인 죽음이 이런 영혼들에게는 얼마나 당순하고 감미로운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을 불태우는 사랑의 불 속에 잠기기 위해 아직 자신들이 해야 하는 자신을 없애고 벗어던지는 일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불은 성령으로서,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를 당신의 말씀과 하나되게 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들은 “생활한 믿음을 통해 그분 안으로 들어가 바로 그곳에서 단순해지고 평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을 만유 위에 그리고 모든 감각적인 맛들 위에 들어 올리시고 거룩한 어둠으로 인도하시며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그들을 변모시켜 주십니다”(뤼스브룩, 믿음 안에서 천국, 넷째 날).
엘리사벳이 삼위일체 생명으로 들어간 것은 수덕적인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 잠기도록 해주신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엘리사벳의 마음에서 성령의 활동은 자신을 정화시키고 거룩하게 하시며 죄에 물들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천상 정배와의 만남을 준비시켜 주었다.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 23-24). 이와 같이 철저한 정화와 쇄신을 거친 다음에 대신덕의 성장이 뒤따른 엘리사벳의 영혼은 한 분이시고 위격으로는 삼위이신 하느님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친밀하게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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