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하느님, 흠숭하올 삼위일체여, 당신으로 살기 위해 나를 잊게 하소서"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론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아낌없이 주어진 카리스마를 기꺼이 받아 협력하였다. 파스카의 그리스도와 일치한 엘리사벳은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아는 지식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페 4, 13)에 다다르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진장한 은총의 근원들을 찾았다. 엘리사벳의 영성에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는 정신과 애정적인 면에서 뚜렷하고, 신학적인 면에서는 자기 영혼 안에 계신 말씀의 현존이었다.
엘리사벳 안에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적 내재하심에 관해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론적 신비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신적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해 피조물의 유한한 마음을 소유하신다. 엘리사벳의 글 안에서 종종 나타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의 모든 영적 가르침의 종합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구원 소명에 대한 엘리사벳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엘리사벳이 하느님 체험을 시작하게 된 것은 유한과 무한한 사랑 사이에 친밀한 교류가 실현되는 성체성사에서다. “제 생각에는 성체만큼 하느님 마음에 있는 사랑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치이자 완성이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자 그분 안에 있는 우리를 말함이며, 이 지상에서 드러나는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1899년에 “그건 신적 사랑의 극치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당신의 공로와 고통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신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생명의 빵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성체성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의 전 존재를 아우르는 생기 넘치고 열렬하며 무상의 하느님 사랑과의 가슴 설레는 고통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과 더욱 완전한 일치 속에 살게 하소서. 당신이 제 마음속에 만들어주신 이 방에서, 당신을 잘 보고 느낄 수 있는 제 작은 모퉁이에서, 오직 그 안에서 살게 하소서”(일기, 1900. 1. 24). 엘리사벳의 삶은 어릴 때부터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떼놓을 수 없는 주님께 끊임없이 드리는 찬미기도의 연속이었다. “주님, 제 생애가 끊임없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그 무엇도, 절대로 그 무엇도, 근심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지 말게 하소서. 당신 안에 깊이 잠기게 하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시선 아래 이루게 하소서”(일기, 1900. 1. 27).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고통 속에서 그분을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분으로 알고, 그분을 닮을 수 있기에 가능하다.
엘리사벳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육화의 말씀과 일치하는 데 수덕 실천에 힘썼다. 그리고 그의 신비체험은 분명 라인 강변과 저지대(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신비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정배의 신비주의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약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혼례의 상징들로 표현했다. 말씀의 강생과 죽음, 영광에 중심을 둔 구원 경륜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부터 엘리사벳 안에서 성자의 모습을 재창조하실 뿐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그를 신격화의 합일에로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를 원하셨다.
엘리사벳에게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외에 삼위일체의 완전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즉 피조물이 전 우주를 통해 삼위일체의 현존의 자취나 영상인 것처럼 십자표는 인간의 각 영혼 안에 살아계시는 삼위일체의 활동을 상기시켜 준다. 모든 것은 영혼에게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준다. 결국 이것은 초월적 존재이신 하느님과 영적 합일을 이루고 있는 영혼에게 삼위일체에 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 안에, 또 우리 주변에서 말씀하시며 친히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영혼이 침묵 중에 귀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한다면, 엘리사벳의 신비체험 안에서 자신이 예배하며 드리는 응답은 실제로 영혼이 아직도 무한하신 삼위일체를 직접 마주 뵈옵고 즐길 만큼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그 영혼이 기쁨과 희생이 뒤섞인 상태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쁨 곁에는 희생이 있기 마련, 그게 이 지상의 법칙이란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행복의 끝에 이르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 주신단다. 하지만 우린 그곳을 향해 있어. 그리고 그분 친히 우리를 당신 품에 안고 인도해 주셔. 나의 동생, 그분은 우리가 비운 모든 것을 저 높은 곳에서 채워주실 거야. 그러니 그것을 고대하며 우리 영혼의 하늘에서 살기로 하자(동생에게 보낸 편지, 1904. 8. 21).
엘리사벳의 경우처럼 삼위일체가 육화하신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 영혼을 소유하는 경우,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고통도 유발한다. 그 이유는 무한하신 삼위일체에게 제지당하든가, 인간의 유한ㄴ한 인성으로 우리가 방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영혼을 삼위일체와의 합일에로 이끄시는 무한자(無限者) 하느님의 신비적 포옹에 안길 수가 없으므로, 영혼은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겠지만, 기다리고 희망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완전한 변모적 합일에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자아를 초월하는 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엘리사벳의 묵상기도에서 정점에 달하는 관상 체험은 그 자신에게 사랑으로 충만한 직관력을 제공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다. 하느님은 그 영적 생활 단계에로 변용시키는 성령의 작용에 자신을 너그러이 내어드림에 따라 이 젊은 수녀에게 온전히 사랑의 공유로 당신을 완전히 내어주신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엘리사벳이 사랑하는 삼위일체의 바로 그 위격들 안에 잠기든가 침투하는 것이다. 그러한 영적 체험은 하느님에 대하나엘리사벳의 사변적 지식을 증대시키지는 않더라도, 그 자신의 인간 본성의 한계를 깨닫도록 도움을 준다. 엘리사벳의 올바른 신앙 체험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배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그의 삶은 풍성한 애덕활동이었기 때문에 엘리사벳의 관상 체험은 진실한 것을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엘리사벳이 내적 생활로 살아간 신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함께’라는 혼례의 표현과도 같은 계약의 신비라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자기 모습 그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미래의 자기 모습 전부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구원받았기에 엘리사벳은 자신을 그분께 드리고 순종하며 자유로이 동정을 봉헌함으로써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인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혼인 관계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 그 자체로 이루어지기에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배가 되는 것이다.
제4장 살기 위해 죽음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둘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사랑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과 여타의 모든 것들에서 무(無, nada)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엘리사벳은 성서적이고 가르멜적인 전통에 따라,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하여 고독과 침묵, 세속으로부터의 이탈, 극기, 한마디로 완전한 비움(kenosis)인 내외적인 사막을 통과하여야만 했다. 그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단계, 곧 수동적 정화는 성령께서 점화하신 사랑의 불가마 속에서 그 영혼을 다듬고 정화시키시어, 영혼을 내적으로 단순하게 만드시고 ‘영의 단순함’으로 일컫는 내적인 경향에로 이끄신다. 그러한 영의 단순함은 실제로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일상 소임에서 완수해 간 새로운 생활양식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엘리사벳의 생애는 성령의 힘으로 선사받은 새로운 존재로 입증된다. 엘리사벳에게 죽음은 생의 종말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가르멜의 사막 성성(聖性)을 추구하는 데 구성요소는 자아 포기와 하느님과의 합일이 있다. 가르멜을 사막으로 여기는 것은 완전한 자아 이탈에 요긴한 수단들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신적 생활 체험의 방법을 배려해 준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와 대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녀를 고독 속으로 인도하고 그녀의 마음 속에 말해 줄 것이다”(호세 2, 14). 하느님께서 듣게 해주실 이 광대한 고독 속에 들어간 영혼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영과 혼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가르기까지 합니다”(히브 4, 12). 그러므로 이 말씀께서 직접 영혼 안에서 그를 적나라하게 벗기는 일을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처럼고 유하고 특별한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들은 것을 믿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마지막 피정, 열한째 날).
사막을 거쳐 가는 것은 자기 몸 안에서 상징적으로 창조의 시간을 재생시키는 동시에 자신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로 변용시켜 주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다. 용맹한 수도자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말로나 인간의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에게 통교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영혼 깊숙한 곳에 침묵으로 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의 규칙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힘은 침묵 안에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힘을 간직한다는 것은 자기의 전 존재를 내적 침묵으로 만들어 모든 힘을 “사랑하는 일에만” 쓰기 위해 모으고, “단 하나의 눈”을 가지고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시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봅니다(가르멜 수도회 원시 회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혼의 노래 28)
유일의 단순 존재자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영으로 단순성의 은사를 받응ㄴ엘리사벳은 명확히 자아를 포기하고, 홀로이신 분과의 끊임없는 대화로 수도생활을 변형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묻힌 엘리사벳은 육신의 절박한 요구들을 잠잠하게 침묵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인간적이 모든 애착에서 해방을 누리며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신적 존재께서는 영원 속에, 무한한 고독 속에 사십니다. 그분은 비록 당신 피조물들의 필요에 대해 염려하시지만, 결코 거기서 나오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결코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독은 다름 아닌 당신의 신성입니다. 그 무엇도 결코 이러한 내면의 아름다운 침묵으로부터 저를 끄집어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같은 조건들, 같은 고독, 같은 이탈, 같은 벗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일 제 바람, 두려움, 기쁨, 고통, 이렇게 이 “네 가지 격정”에서 오는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질서 지워지지 않는다면, 제 안에는 소음이 있게 될 것이며, 저는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능력들을 진정시키고 “잠재우는 것,” 존재를 통일시켜야 합니다(마지막 피정, 열째 날).
이 영적인 가난 상태와 망각, 전적인 자아 포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외적인 사물로부터의 표면적인 결별’이 아니라 ‘영의 고독’이자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믿음 안에서의 천국, 둘째 날)을 말한다. 삼위일체의 거룩한 침묵으로 감싸인 엘리사벳의 영혼은 하느님께 봉인 받아 그분 자신으로 변용된다. 하느님과 엘리사벳 사이의 침묵에서 이뤄진 그토록 친밀하고 신비스러운 일치에서 그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엘리사벳은 영적인 무관심한 상태에서 하느님만이-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자신에게 관심이 되어 살고, 여타의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고 무의미한 것들이 된다.
제 생각에, 이것은 스승님께서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던 “필요한 오직 한 가지(루카 10, 42)”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위대한 성녀는 이 점을 얼마나 잘 이해하였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빛으로 환해진 그 영혼의 눈”은 인성의 베일 아래 있는 자신의 하느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능력들의 침묵과 통일 속에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내 영혼은 언제나 내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도 노래했습니다. “Nescivi(나 자신도 더 이상 몰랐네)!” 성녀는 그분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성녀 주위가 요란하거나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Nescivi!” 성녀를 탓할 수도 있었습니다. “Nescivi!” 하지만 자신의 명예나 외적인 그 무엇도 거룩한 침묵으로부터 그분을 빼내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잠심의 성채” 안으로 들어간 영혼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제 분명한 믿음 속에서 열리게 된 이 영혼의 눈은 자신 안에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이 영혼은 그분께서 지극정성으로 보호해 주신 이토록 아름다운 순수함과 더불어 그분 면전에서 머뭅니다. 바깥의 여러 흔들림 그리고 안으로 폭풍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명예가 공격당할 수도 있습니다. “Nescivi!” 하느님께서 숨으실 수도 있고 감각적인 은총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Nescivi!” 하지만 우리는 성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필리 3, 8). 이제 스승님은 “각자의 정도에 따라” 당신 자신을 부어주고 내어주시기 위한 자유를 지니십니다. 그리고 이처럼 순수하고 통일된 영혼은 불변하신 분이 머무실 옥좌가 됩니다. 왜냐하면 “단일함”은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옥좌이기 때문입니다(마지막 피정, 둘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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