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성령의 이끄심
엘리사벳은 참된 관상자로 성 바오로의 신학적 가르침을 되새김으로써 자기 영혼 안에 작용하고 계시는 분과 일치할 수 있었다. 엘리사벳은 삼위일체의 제3위격의 특별한 활동을 아는 것 외에도, 피조물들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도하고 완성하시는 사랑의 영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자기 영혼 깊숙이 머무시는 성령의 숨결에 늘 고무되어, 하느님의 감도하심을 더욱더 잘 수용함으로써 성령의 작용하심을 완전하게 따르는 유순함을 드러내보였다. 엘리사벳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기에 앞서 끊임없는 믿음으로 행하였다.
모든 것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고 행하며, 굳건한 희망을 동기로 삼고, 깊은 사랑으로 격려를 받아 그렇듯 완전하게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자세를 연마할 수 있었던 엘리사벳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 모든 것이 외적으로 드러났다. 성령의 선물과 대신덕의 3덕은 엘리사벳 안에서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기에 그 자신의 삶은 절대자 하느님을 향해 가는 순례의 여정이 되었다. 엘리사벳 안에서 친밀하게 작용하시는 성령께서 그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기까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계속 그 안에 머무셨다. 결국 이 젊은 가르멜 수녀는 성령의 은사에 고유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엘리사벳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안에 단순하게 사는 것이 곧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신의 내면에로 관상적인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변모작용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신비들 안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자기 안에 거주하시는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을 더욱더 잘 알고 있었다. 성 바오로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 14)라고 한 말씀대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적 생명의 원천과 기원은 반드시 육화의 신비와 연관되지만, 새 생명에로의 승화는 엘리사벳이 “삼켜버리는 불꽃”으로 알고 있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작용인데, 이 불길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간에 정화시키고 변모시키는 사랑의 불꽃이다. 거듭남의 신비를 실현하시는 성령께서는(티토 3, 5) 엘리사벳 안에 거주하시는 성자의 모상에 따라 전형적인 새로운 존재방식을 건네주신다. 이와 같이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손 안에 든 한 악기가 되어 “성령의 신비로운 터치 아래 있는 칠현금처럼 침묵하는 영혼으로서 성령께서 그 안에서 신적인 화음들을 끌어내실 수 있도록” 고요히 머물렀다. “사랑의 영께서는 영혼을 변모시켜 주십니다, 이는 사랑과 용기의 영이 부족한 이를 대신해서 그에게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참으로 엘리사벳은 자신을 “하느님의 성전”(1코린 3, 16)으로 삼고 “하느님의 영과 일치하여”(필리 3, 3) 살아있고 거룩하며 기꺼운 희생제물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신적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자기의 온 생애가 찬미의 예배가 되도록 부름 받았음을 느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 안에 주입하신 성성, 곧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는 삶이었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단순한 삶을 사는지, 또 그 사람이 얼마나 진복자들이 누리는 영적인 삶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기 자신과 일체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지 몰라! 그런 사람에게 일체의 모든 것은 스승님께서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던 ‘유일한 필요’(루카 10, 42), 바로 그 하나로 모아진단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참으로 위대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뜻 안으로 자기 의지를 몰아가기 때문이야’”(편지 310). 그와 더불어 엘리사벳은 리지외의 데레사의 중재로 청했던 사랑하는 임의 손 안에서 겸손하고도 신뢰 가득한 의탁의 은혜를 받았다(편지 179). 엘리사벳은 참으로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자기 이름의 의미대로 살았고, 사랑의 성령이 내재하심으로 인해 그분과 합일되었다.
성령과 엘리사벳의 영적 성장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양자(養子)의 관계로 진보하여 인간적인 모든 것을 더욱 이탈하기에 이른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성 바오로께서 다음 구절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부르셨다”(로마 8, 30).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삼위의 날인(捺印) 받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2베드 1, 4)고 하는 성 베드로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그분 존재로부터 시작”(히브 3, 14)을 선사받았습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여덟째 날).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사벳은 신적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성화 은총과 더불어 초자연적인 주입 덕행과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다. 엘리사벳의 “신화” 과정에서 특징을 이루는 새로운 생활과 행동 양식은 믿음, 희망, 사랑이란 대신덕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믿어야 합니다”(히브 11, 6). 또한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 1). 이는 믿음이 미래의 선들에 대한 확실함을 전해주며, 이를 현재화시켜 줌을 듯합니다. 이러한 선들은 믿음을 통해 우리 영혼 안에 존재하며 우리가 이를 누리기 전에 이미 효력을 갖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는,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감에 있어 발의 역할을 해주는 것”(영혼의 노래, 1, 11)으로 “어두운 상태에서 소유하는 것”(영혼의 노래 12, 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가 사랑하는 분에 대해 참된 빛을 전해 줄 수 있으며, 우리 영혼은 지복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영혼의 노래, 12, 2). 믿음은 우리의 맡바닥에서 모든 영적 선들을 풍요롭게 넘쳐흐르게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솟아나게 될 생활한 샘물”(요한 4, 14)을 주기로 약속하신 것은 다름 아닌 이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믿음은 아직 현세 삶 속에서 참으로 숨어계신 하느님, 즉 그분을 베일 속에 가린 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하지만 이분은 하느님 자신입니다(영혼의 노래 12, 4)”(믿음 안에서 천국, 여섯째 날).
이 젊은 가르멜 수녀에게 믿음은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뵙는 것이지만 어둠에서 그럴 뿐이고, 지복직관에 이르기 전의 소곡이다. 둘째로, 믿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건한 신념으로 신뢰심과 전적인 포기를 동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이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 16).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이 하는 커다란 일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하느님께 사랑을 사랑으로 되돌려 드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는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성부의 마음 속에 ‘숨겨진 비밀’(콜로 1, 26)로서, 결국 우리가 깨닫게 될 비밀이자 우리의 온 영혼이 전율하게 될 비밀입니다. 영혼이 자신에 대한 ‘이토록 엄청난 사랑’(에페 2, 4)을 믿게 될 때, 모세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굳건히 견디어 냈습니다”(히브 11, 27). 이런 영혼은 위로와 유감 속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하느님을 느끼는지의 여부가 중요치 않습니다. 그분이 기쁨이나 고통을 주시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그분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시련을 받을수록 더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사랑이신 분의 품 안에 쉬고자 나아가면서 부딪치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여섯째 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과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랑의 응답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믿음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의 희망과는 상치될 수 있는 굳건한 희망을 동반한다. 엘리사벳에게 희망의 덕은 신덕의 한 측면이고 사랑의 덕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것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엘리사벳의 사랑은 이웃을 위해 자기 생명마저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서 우리의 사랑을 진실하게 해달라고 청하기로 해요. 우리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기를 청합시다. 제가 보기에 희생은 실천으로 이어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편지 250). 대신덕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엘리사벳에게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사랑 없이는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될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에 엘리사벳은 믿고 사랑하였다. 엘리사벳은 모든 의인들처럼 성령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 주입해 주신 성화 은총으로 성령의 은사들과 대신덕을 소유한 초성적 영혼이었다. 성령의 활동에서 주님께 대한 두려움의 은사는 오직 그분 안에서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서 이탈하게 해준다. 굳셈의 은사는 엘리사벳이 1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살고 죽을”(일기, 1899. 3. 31) 것을 열망하면서 고통을 참아 견디는 용맹한 태도를 지니게끔 한다. 효경의 은사를 통해서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먼저 삼위일체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는 데 힘썼다. 엘리사벳은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도 의견의 은사를 통해 성령의 충동과 장상들의 지도를 유순하게 따랐다. 결국 지식과 슬기와 지혜의 은사들을 통해 엘리사벳은 이 세상에서 피조물의 공허함과 인간 존재의 우연성을 체험할 수 있었던 반면에,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신적이고 영적인 진리 안에로 깊이 침투되어 자기 영혼의 천국에서 그분과 긴밀히 일치했다.
성령과 하느님의 내재 일곱 가지 은사로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의지와 지성을 초자연적 활동과 연계시켜 움직이셨다. 따라서 엘리사벳은 경외심의 은사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초대된다.
각각의 영혼은 “천상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찬미하는 영광의 찬미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영혼은 순수한 사랑 안에 확고하게 서 있으며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생명을 살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각각의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시듯 그렇게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 12). 지성은 하느님의 지성이며 그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요 그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됩니다.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사랑의 영께서는 영혼을 변모시켜 주십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보십시오. 스승님께서는 이렇듯 우리 안에 살고픈 당신 원의를 드러내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사랑, 그것은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것이자 동시에 그분을 당신 피조물에게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처럼 강하고 큰물로도 끌 수 없는”(아가 8, 6-7) 사랑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셋째 날).
그토록 완전한 삶에 이르고자 엘리사벳은 관대한 마음으로 수덕 생활에 적극 노력하면서 성령의 순수한 활동에 자신을 내맡겼다. 가르멜의 신비가로 하느님의 영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 지상에 깨어 머무는 동안 거룩하게 되어 자신의 영혼 안에 일하시는 삼위일체의 현존 체험을 이미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안다면..” 하느님의 선물을 아는 피조물, 그 선물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은 피조물, 지극히 순수하고 빛을 발하는 피조물, 마치 빛 자체인 듯이 보이는 피조물이 있습니다. ‘정의의 거울.’ 그토록 단순하고 온전히 하느님께 전념하고 있는 피조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충실한 동정녀.’ 충실한 동정녀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면전에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여겼고 성전 지성소에서 자신을 깊이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그런 그분의 모습은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기쁨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루카 1, 48). 성부께서는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몰랐던 이 피조물을 향하는 가운데, 영원으로부터 성부이셨던 하느님, 그 성부의 사람의 때가 이르자 그 여인을 그의 어머니로 만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든 업적을 간직하신 사랑의 영께서 그분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동정녀께서는 “이루어지소서(fiat)”하며 응답하셨습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열째 날).
자신의 생애에서 어머니요 이상적인 표본이 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같이 엘리사벳 역시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일하심에 자신을 맡겨드렸다.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와 똑같이 총명하고 관대한 수용적인 자세와 고요한 흠숭의 자세,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신 삼위일체와의 친밀한 일치의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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