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으로 살기 위해 나를 잊게 하소서"
제3장
성자의 모상에 일치
엘리사벳은 육화하신 말씀과 내적으로 더 동화되어 그분을 통해 삼위일체의 깊은 생명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분의 신성한 영혼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이 바라신 모든 이상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의 뜻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앙글레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2. 9. 29).
엘리사벳의 영적 생활이 그리스도의 신비에 집중되는 한, 그것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해설대로 성 바오로의 신학과 가르멜 전통에서 자라난 것이다. 참으로 엘리사벳의 신비론은 삼위일체설이 되기에 앞서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와 합일하는 변모적 일치에로 인도된다. 이러한 엘리사벳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완덕으로 향해 가는 특별한 길이 제시된다. 결국 엘리사벳의 삶은 이제 사랑의 완성에 대한 보편적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또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소명을 좀 더 넓은 안목에서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초대인 것이다.
육화하신 말씀은 삼위일체께로 가는 길 디종 가르멜 수녀의 신비체험은 일차적으로 지상적 실재를 초월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지만, 그것은 도피로써가 아닌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스승님 곁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영혼과 깊은 친교를 나누고 그분의 모든 움직임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성부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 저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지복직관이 될 것이며, 이 신적인 빛 아래서 저 자신은 신비의 심연 속으로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슈비냐르 학사에게 보낸 편지, 1903. 2. 24).
“내 안에 머물러라.”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를 명하시면서 그러한 원의를 드러내십니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일정한 순간이나 시간뿐 아니라 항구하게 습관적으로 ‘머무르십시오.’ 여러분은 내 안에 머물고 내 안에서 기도하며 내 안에서 경배드리고 내 안에서 사랑하고 또한 내 안에서 고통 받으며 내 안에서 일하고 행동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내 안에 머물며 매번 더욱더 깊이 이 심연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예언자가 노래하듯이, 이곳이야말로 진정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말씀을 건네기 위해 그를 이끌어 들이고자 하시는 고독”의 장소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첫째날).
그분은 우리를 성화하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그분 친히 우리의 성성(聖性)이 되시도록 그분께 청하기로 해요. 거룩한 복음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분에게서 비밀스러운 힘이 나왔다”(루카 6, 19 참조)고 전합니다. 병자들은 그분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회복했고, 죽은 자들은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은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감실에, 흠숭하올 성사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영혼 안에도 살아계십니다. 또한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앙글레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03. 11. 24).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성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용어가 엘리사벳에게 동의어가 되는 것은 하느님은 영원하신 계획 안에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에 다다랐다. 엘리사벳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관상하고 그들 사이에 순환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적 사랑을 경배하였다. 그리고 성령께 열렬히 탄원했다. “오, 태워버리는 불, 사랑의 성령이시여, 저에게 오소서! 제 영혼 안에 또 하나의 말씀을 낳으소서. 저로 하여금 인성의 연장이 되게 하시어 주님의 온갖 신비를 새롭게 하소서.”
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헐벗고 해방된 파조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 그는 감각, 본성 위로 오르고 고양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넘어섭니다. 또한 그는 모든 기쁨과 고통을 초월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분이자, 자신에게 친히 “심연의 안식”을 선물해주시는 분의 “내면 안으로” 깊이 관통해 들어가기까지 결코 쉼없이 구름들을 거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 거룩한 성채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 아직 그곳에서 나오지 않은 채, 그는 불변하는 삼위일체의 모상에 따라 영원한 현재 속에서 “그분 자신으로 인해 늘 그분을 흠숭하며” 언제나 더욱 단순하고 통일된 시선을 통해 “그분 영광의 광채”로 변화되면서 또한 흠숭하올 그분의 완전함에 대한 영광의 찬미를 끊임없이 드리며 살 것입니다(마지막 피정, 열여섯째 날).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 삼위일체의 품 안에서 영광의 찬미를 자신의 성소로 깨닫기 위해, 엘리사벳이 찾은 길은 오로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모상을 닮는 것이었다. 엘리사벳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콜로 3,10)이 되고 자유를 주시는 그분의 능력과 구원 현존, 그리고 새 생명으르 주시는 사랑의 표현으로 하느님의 원(元)영광에로 권리를 회복(로마 3,23)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그리스도의 온유한 순종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애의 끝날에 “하느님의 거룩한 분은 이 영혼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영혼을 당신으로 입혀주기 위해’(갈라 3, 27 참조) 모든 것을 멸하실 것이며, 이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선구자의 말씀을 실제로 실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 3, 3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라 2, 20). 이것이 바로 가르멜 수녀로서의 제 영혼이 꿈꾸는 것입니다. ...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꿈꾸신 것입니다. 그 꿈이 우리 영혼 안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도록 그분께 은총을 청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모든 신비를 쇄신하게 해주는 그분의 또다른 인성(人性)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제 안에서 흠숭하올 분, 속죄주, 구세주로 자리잡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 은총을 청했습니다. 그분께서 제 무능함을 보완하신다고 생각하면, 제 영혼에 얼마나 큰 평화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 제가 걷는 매순간 넘어지면, 그분은 바로 거기서 저를 들어올려 주시고 더욱더 깊이 당신께 데려가십니다. 우리는 이미 은총을 통해 이 신적 본질의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거기 심연 속에 숨고 싶습니다. 그 무엇도 저를 거기서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슈비냐르 학사에게 보낸 편지, 1904. 11. 29).
엘리사벳은 자신의 기도와 희생과 찬미로 새로 육화한 그리스도가 되었다. 엘리사벳 스스로 증명하듯이, 그의 그리스도와의 전적인 일치는 사랑의 열매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스승님께서는 사랑의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은 당신의 원의를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 그분께는 우리 영혼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기쁘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하느님과 동등해질 만큼 성장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높이 들어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사랑의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 고유한 것은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 이와 동등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여기서 영혼은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의 상호 우정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공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 15).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어드려야 하며”(영혼의 노래, 28, 2)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부드럽게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영혼의 노래, 28, 10 참조). 그러므로 그가 지닌 성향들 그리고 그의 기관들이 이 사랑 안에서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움직여져야 합니다. ... 이제 “사랑은 그러한 모습으로 영혼을 채워주고 흡수하며 보호해줍니다. 이제 영혼은 모든 것 안에서 사랑 가운데 성장하기 위한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데, 심지어 이는 그가 세상과 갖는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영혼의 노래, 27, 8). 이제 그는 삶에 대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유일한 걱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영혼의 노래, 28, 91).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은 자아에 죽어야만 한다.
“저는 날마다 죽어갑니다”(1코린 15, 31). 저는 매일 저 자신을 포기하는 가운데 점점 더 작아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 점점 더 자라고 높이 들어올림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저는 더 이상 제 삶을 살고자 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되고자 합니다”(영혼의 노래, 12, 7). 이는 제 삶이 인간적이기보다는 더욱 거룩하게 됨으로써 성부께서 제게 고개를 숙이실 때 당신이 총애하고 사랑하시는 성자의 모상을 알아볼 수 있기 위함입니다(믿음 안에서 천국, 셋째날).
그렇지만 엘리사벳은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또 한 분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개인적인 체험에서 알게 된 가르멜 성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충분히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르멜 수녀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는 영혼, 그분을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성부께 봉헌하는 희생제물로 관상하는 영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이 거대한 비전 아래 자신을 거둬들이며, 그 영혼이 간직한 사랑의 열정을 이해하고 그분처럼 자신을 내어드리길 원하는 영혼입니다(제르멘 드 제모에게 보낸 편지, 1902. 8. 7).
엘리사벳에게 있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충실한 모든 정배들에 의해 입증되는 가장 큰 사랑의 요구이다.
“Configuratus morti eius: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습니다”(필리 3, 10). 이 말씀은 계속 저를 뒤따르며 고통 중에 있는 제 영혼에 힘을 줍니다. 신부님께서 만일 제가 존재 전체로 느끼고 있는 망가져 가는 상황을 아신다면 놀라실 거에요! 그건 이미 시작된 갈바리아의 길입니다. 하지만 저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거룩하신 분 곁에서 그분의 신부로 걷는 게 많이 기쁩니다. ... 아, 제가 더 이상 제가 아니라 그분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성부께서 저를 보시며 당신을 알아보실 수 있도록 그렇게 축성해 주세요! “제가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게 되길,” 그리고 교회인 그분의 육신이 받는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며 고통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제가 그분의 힘과 더불어 강해질 수 있도록 그분의 피로 젖어들게 해 주세요(앙글레 참사회원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06. 7. 8).
정배로서의 엘리사벳과 천상 신랑님, 이 둘 사이의 일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자기 몸으로 또다시 살 수 있게 하는 파스카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엘리사벳이 자기의 몸으로 체험한 신비는 그리스도와의 혼례의 완성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완수를 촉진시켰다. 이 엄청난 신비체의 책임을 진 엘리사벳은 고통의 으스러진 마음으로 이렇게 외친다.
자신의 성전에서 밤낮 하느님을 섬기려는 영혼은 사도 바오로께서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 17)라고 말씀하신 그 내면의 지성소에서 실제로 자기 스승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는 구속된 자이지만 동시에 다른 영혼들을 구속해야 하기에, 자신의 칠현금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저를 자랑합니다(갈라 6, 14).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갈라 2, 19).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엘리사벳이 이 세상에서 눈을 감기 전에, 가장 격심한 고통으로 바스러졌지만, 성인들의 통공에서 자기 고통의 효력을 알아듣는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자기 존재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이르기까지 환난을 겪어, 하느님의 순결한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빨아 희게 된 옷을 입었다. 영웅적인 고통을 치르고 이 신비가는 이제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빛에서 빛으로 변용되기에 앞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육화의 말씀과 비슷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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