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의 제 사명은 영혼들이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가운데 아주 단순하고 온전한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이 위대한 내면의 침묵 속에 지켜주는 일도 제 사명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굳건하고도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스승님은 그분을 제게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승님은 성부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제 육신 안에서 고통받을 수 있도록" 저를 십자가 위의 당신 자리에 놓아주셨습니다.
동정녀께서는 그분처럼 고통 받는 법을 제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당신 이외에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마지막 노래들을 제게 들려주기 위해 여전히 그곳에 계십니다. 제가 "다 이루었습니다"(요한 19, 30) 하고 말씀드리게 될 날, '천상의 문'이신 어머니께서는 아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님의 집으로 가자고 사람들이 내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시편 122, 1) 라는 신비로운 말씀을 제게 하시며 저를 천상 뜨락으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 -마지막 피정 41-
관상 체험에서 형제적 사랑 엘리사벳은 매우 영적이어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아주 가깝게 느끼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엘리사벳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서 체험하셨던 구원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언제나 그분 안으로 더욱 깊이 스며들기 위해 그리고 그분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을 모르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기도를 통해 그분을 전하기 위해 저는 온전히 침묵하고 흠숭하렵니다(편지 131).
엘리사벳에게 애덕은 관상자의 관대한 봉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육화하신 말씀 안에 나타나 계신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와 전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 나의 수녀님! “그분이 되는 것,” 여기에 제 모든 열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의 시선, 한 번의 열망을 갖는 것만으로 우리 안에서 흠숭 받으시는 당신의 말씀을 관상하고 계시는 성부께서 거부하시지 못하는 강력한 기도가 된다고 믿지 않으세요? 오, 그렇습니다. 그분이 되기로 해요. 그리고 그분의 숭고한 영혼의 움직임 속에서 “성부께 갑시다”(편지 121).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처럼 디종의 엘리사벳에게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보 없이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엘리사벳을 봉쇄 수녀기 되게끔 하고 또 그 생애의 게획이 되었던 이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유는 그가 천국에서 영원히 하느님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요, 사랑하는 자매여, 사랑은 우리를 이 땅에 오랫동안 묶어두질 않는답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성 요한께선 그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감탄할 만한 어느 장(章)에서 영혼들의 죽음을 사랑의 희생제물이자 그분께서 그 영혼들 안에서 이루시는 마지막 격렬함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더욱이 영혼의 모든 강들은 신적인 사랑이라는 대양 안으로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그 강들은 이미 바다와 비슷하여 광대무변하답니다. ... 단순하고 사랑 가득한 신앙의 눈길로 그분과 늘 일치해 있다면, 그리고 흠숭하올 우리 스승님처럼 우리가 매일 늦은 오후에 “나는 내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 마음에 드는 모든 일을 합니다”(요한 8, 29)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분께선 우리를 잘 살라주실 것입니다(편지 293).
엘리사벳이 지녔던 사랑과 같은 사랑만이 다가올 세상에서 완전히 하느님과 합일될 행복을 이미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는 그런 드높은 단게의 하느님과의 친교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엘리사벳과 삼위일체 간의 사랑이 이끄는 목표인데, 엘리사벳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거룩한 일치가 결실에 이를 수 있는 완전히 정화된 마음으로 지극히 열망하는 실체를 향해 가는 변함없는 진보였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신의 교유한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오히려 모든 피조물을 다 끌어안은 채, 그 모두를 자신의 사랑하올 정배께 영원한 사랑의 찬미가로 만들어 드릴 수 있었다.
제9장 메시지의 실재성
엘리사벳이 남긴 메시지의 실재성을 이해하려면, 간단하게나마 여기까지 전개시켜 온 점들에 대해 다시금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성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인용된 다음의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 16). 엘리사벳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믿음 안에서 굳건히 견디어 냈고, 넘치는 사랑으로써 믿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성 요한처럼 엘리사벳에게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인간생활의 외적인 길도 아니며, 어려운 수덕의 여정도 아닌,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계시는 사랑의 위격이시다. 말하자면 그분은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사랑을 계약하는 장소이시다.
엘리사벳의 삼위일체 친교체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엘리사벳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상호 간 인겪적인 친교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숨결로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내어주시며, 엘리사벳을 삼위일체 안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로 이끌어주셨다.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함으로써, 엘리사벳은 자기 내면에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다”(1요한 3, 20). 엘리사벳의 마음은 그분의 구원 계획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이든 거부하지 않고 봉헌하며 그분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드리기 위해 완전한 포기와 순종으로 응답해 드린다.
관상에 봉헌된 영혼으로 엘리사벳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관대히 자신을 봉헌하고 의탁함으로써 자신의 특별한 카리스마을 실행하는 가운데 삼위일체의 영광이 되어 드리고, 하느님으로만 점유되는 찬미의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는 데 있어 전형적인 가르멜 수녀로서의 중요한 원리를 드러내 보였다. 즉 신적 친밀의 결실과 완성에 필수적인 침묵에 절대필요한 조건으로서의 고독,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자신의 전 생활의 유용성으로서의 기도, 그리고 삼위일체와의 친밀에 이르는 데 확실한 길이신 파스카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수덕적인 측면으로서의 고행이 그것이다.
파스카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와의 친밀에 이르는 데 확실한 길이다. 고독과 침묵은 사막 영성의 구성요소들로, 엘리사벳은 단호한 결심과 용기를 지니고 그것들을 끌어안았다. “아버지께서는 한 말씀만 하셨는데 바로 말슴이신 성자이시다.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영원한 침묵 중에 표현하시며, 영혼이 그 말씀을 듣게 될 수 있는 것도 침묵 안에서이다”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했다. 외적 침묵이 엘리사벳을 내적 침묵-기억, 생각, 감성과 영의 침묵-으로 인도하였고, 이것은 그가 그분을 찬미, 흠숭할 수 있도록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영혼을 준비토록 하는 유일한 침묵이다. 엘리사벳의 기도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였지만 특히 영혼에 내재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경배였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 새롭게 창조되어 그리스도 파스카의 죽으심과 부활이란 변증법적 역동성에 들어간 사람은 성덕에 힘쓰면서 새롭고도 완전한 인간 성장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모습을 끊임없이 닮아가도록 스스로 노력하여야 한다.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를 닮아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형성하여야 한다(갈라 4, 19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들과 동화되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필리 3. 2; 2티모 2, 11; 에페 2, 6; 콜로 2, 12 참조). 아직도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가 환난과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머리에 결합된 몸으로서 그분의 고난을 함께 받는 것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다(로마 8, 17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에페 4, 23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주셨으며, 머리와 지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한 분이신 똑같은 성령께서는 온 몸에 생명을 주시고 온 몸을 일치시키시고 움직이신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7항).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인간이 실존적 응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생명은 희망이 완성되고 휘장이 걷힐 때까지 성부, 성자, 성령의 찬미와 영광이 되는 사랑의 교향곡이 될 수 있다. 그때가 되어야만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 4-5). 의인들은 시간도 공간도 장소도 없고 계절도 초월한 영원한 봄날에 오로지 사랑의 태양이신 하느님의 찬란한 빛을 받으며 영원한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힌 두루마기들을 빨아 입은 의인들은 그곳에서 끊일 줄 모르는 기도의 환희 중에 머물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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