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교회에 봉사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 19, 4). 엘리사벳에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독수리의 상징을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분께서는 아버지께서 뽑으신 영혼들을 기도와 십자가라는 두 날개에 태워 데려다 주신다. 그러한 날개에 실려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에까지 다다른 이 디종의 신비가 역시 삼위일체 하느님과 자기 형제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켜 준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일치와 만남에 이르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만 했다.
가르멜에서 관상 체험 끊임없이 범람하는 유물론적 세계에서 가르멜의 관상적인 봉사는 고독과 전적인 이탈의 분위기에서 고요의 기도와 포기를 통해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가르멜의 신비, 그 특성에서 흘런오게 된다. 사랑의 하느님과 맺는 사랑의 통교로 보는 기도가 가르멜 생활의 중심이다. 사랑에 기반을 둔 그러한 관계는 특히 사랑의 이중 개념에 일치하여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어주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가르멜의 기도단계는 사랑과 희생과 다양한 여정에 따라 설정된다. 그 출발점은 무한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확신이며, 자신의 본성적 한계를 초월하여 침묵과 고독 가운데, 또 고통과 희생 중에,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어려움을 스스로 떠안아 수도원 봉쇄 담을 넘어 크나큰 사랑의 호흡을 널리 전하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 그 종착점이다. 엘리사벳은 인류가 하느님께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구원 신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감지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함께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를 청하였다.
이미 그분은 내 안에 사시니까, 아! 얼마나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과 함께 고통받고 죄인들 대신 속죄하기를 바라는지 그분께 말씀드리고 싶다. 그분께 보여드릴 수 있는 희생들을 드려야지. 오,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사랑하는 정배! 당신께 십자가를 청합니다. 제게 당신의 십자가를 주소서. 당신과 함께 그 십자가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참 많이도 고통받으셨습니다. 이젠 제가 당신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죄들을 짊어지렵니다. 오직 저만 보소서. 저를 벌하소서. 저는 당신의 희생제물입니다. 저는 당신의 신부이고 당신 마음의 심복입니다(일기, 1899. 2. 10).
엘리사벳은 희생물과 정배로서 자신의 성소에 충실히 머물러 있기 위해 어떤 종류의 고통도 거절하지 않았다. 자기 존재에 스며든 속죄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에서 그런 태도가 나오게 하였다. 그같은 속죄의 사랑은 인류의 온갖 고민과 문제들을 한데 모을 수 있으므로, 그것들은 하느님의 어루만짐으로 고쳐질 수 있었다. 그것이 엘리사벳의 깊은 교회적 감각에서 우러나오는 사도적 열성이었다. 그렇기에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을 간절히 열망했다. 엘리사벳의 하느님과 대화는 자신을 모든 인류와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그들의 대리자로 인식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과 사도적 효과를구체적으로 체험하였다.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사시기에 그분의 기도는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의 원천이자 샘이신 그분 곁에서 작은 그릇으로 머물며, 끊임없이 그분의 기도와 친교 중에 있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물결이 넘치는 가운데, 다른 영혼들에게도 그 기도를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19). 흠숭하올 우리 스승님의 이 말씀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기로 해요. 우리는 하나의 몸에 속하는 지체들이니(로마 12, 4-5 참조),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는 만큼, 교회라고 하는 거대한 몸에 그 생명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편지 191).
엘리사벳은 “행동하는 관상가”가 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자신의 가르멜 성소를 깨닫게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녀 데레사가 당신의 딸들에게 요구하였던 것과 충분히 어울리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영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날이 죽어가는 영혼들이 이 이상 더 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아! 그리스도 안의 내 자매들이여, 이 기도가 잘되기 위하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여러분을 이것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성소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할 일이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소원이라야 하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기도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여기에 여러분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 여러분의 기도와 소원과 재소 등이 방금 말한 바를 위하여 쓰이지 않을 때, 주께서 이 곳에다 여러분을 모아주신 그 목적조차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완덕의 길, 1장과 3장). 엘리사벳은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성녀 데레사의 진정한 딸로서 제가 사랑하는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사도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모 성녀 데레사처럼 제가 참된 신부로서 그분의 명에를 열렬히 드높이도록 이 세상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편지 276).
가르멜 수녀는 빛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가르멜 수녀는 기도 안에서 온 세상을 품어 안을 때 참으로 사도가 됩니다(추억들).
엘리사벳에게 관상 생활의 역동성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 안에 머무시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또다시 강생하셔서 그를 통해 계속해서 인류를 사랑하시며, 성령의 힘을 통해, 성자의 고귀한 성혈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가르멜 수녀와 사제 엘리사벳의 신비생활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관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과 기대를 걸고 있는 형제들을 찾는 데 힘써 노력하고 계신 하느님의 절대성을 알고, 또 그것을 끊임없이 행하는 친밀한 대화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의무로 짓눌렸음에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풍요롭기 그지없던 엘리사벳은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감실 앞에 켜져 있는 등불처럼, 엘리사벳은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 침묵, 고독, 희생, 자기부정을 통해 가깝거나 멀고를 막론하고 교회를 위해, 특히 사제들과 이웃의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시선을 끄는 강력한 중재수단으로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를 불태웠다.
엘리사벳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책임을 느꼈다. 엘리사벳의 사명은 이웃의 선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호소하면서 하느님과의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드높은 관상 중에 성령의 음성에 충실히 귀기울이고 기도를 하는 중이건 그렇지 않은 경우이건 간에 기쁨과 슬픔, 위로와 피로, 걱정과 희망의 표현들로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목소리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엘리사벳은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자신의 사랑의 기도로써 구제하고 해방을 가져다주는 포옹으로 감싸고 품어안았다. 결국 엘리사벳의 신비생활은 이웃을 위한 예민하고도 신중한 사랑의 봉사였으며, 그것이 자신이 봉쇄생활의 사제적인 측면을 강력하게 강조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로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얼마나 많이 성화되고 저 자신을 잊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 가르멜 수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중개자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또 다른 인성이 됨으로써 그분이 자신 안에서 구속과 희생, 찬미와 흠숭의 삶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해 드려야 합니다(편지 256).
아, 스승님께서 이렇듯 엄마의 속에서 빚어진 열매인 이 엄마의 딸을 당신의 위대한 구원사업에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당신 수난의 연장으로 당신이 그 안에서 고통 받기 위해 선택하신 걸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떨릴까! 신부는 신랑을 위해 있어. 그리고 나의 신랑께서는 나를 취하시면서 내가 당신의 또 다른 인성이 되길 바라셔. 그래서 그분이 그 안에서 당신 성부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당신 교회의 궁핍한 이들을 돕기 위해 아직 고통 받길 바라셔(편지 309).
사제가 성사 집행을 통해 구원의 통로가 되는 데 비해 막달레나와 같은 엘리사벳은 침묵 중에 말씀을 경배하는 사제였다. “저는 사제의 삶과 가르멜 수녀의 삶이 영혼 안에 주님의 강생을 준비하는 대림과 같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합니다”(편지 250).
결론적으로 엘리사벳의 관상생활은 봉쇄 담벽 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내적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투쟁 중에 있는 교회로부터 흘러나와 온 세상 만민에게 구원과 거룩함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디종의 이 신비가는 예수성심께 깊이 잠겨 주님의 속죄적 사랑을 길어낼 수 있었기에, 자신의 기도가 동정 성모 마리아와 같이 공동 구속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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